[추천신간도서]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 이윤학 시집 (간드레 시 01)

[추천신간도서]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 이윤학 시집 (간드레 시 01)




가장 춥고 어두운 생의 이면을 밝히는 불빛

이윤학 시집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

(간드레, 2021)


『짙은 백야』(문학과지성사,2016)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이윤학 시인의 열 번째 시집『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간드레출판사)이 ‘간드레 시’ 1번으로 출간되었다.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31년간 뚜렷한 시의 궤적을 새겨온 이윤학의 시력은 이번 시집에 이르러 더욱 완성도 높은 작품을 보여준다. 10은 전체를 아우르는 완전수이지만 그는 자신의 시 세계에 타협하지 않고 초심으로 돌아가 열 번째 시집을 내놓았다. 한층 농밀해진 그의 시 세계는 금광의 갱도를 뚫고 금맥을 찾아 전진하는 굴착기와 한 몸이 된 광부처럼 처절하고 필사적이다.
“아버지가 금광(金鑛)에 다닐 때 사용한 간드레가 내 방에 걸렸다. 면벽(面壁)을 할 때마다 간드레가 유년의 시간들을 밝혀주었다. 어느 순간 방안은 금광의 갱도로 변하고 나는 희뿌연 돌가루 속에서 금맥을 찾는 광부가 되었다. …(중략)… 그 옛날 아버지의 젊은 날과 함께한 간드레를 보면서 나는 내가 아버지의 금광이었음을 되새긴다. 아버지가 내 눈을 들여다보았듯 나는 내 글을 들여다보면서 한 사람의 독자를 상상한다. 이 금광은 내가 죽어서도 얼마간 폐광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간드렛불을 켜 들고 몸속의 금맥을 따라 나아간다.” -「에필로그」중에서.
타협하지 않는 정신의 길이야말로 이윤학 시인이 추구하는 시의 세계이다. 오직 자신을 잃지 않는 자만이 품을 수 있는 사금의 가녀린 빛, 그 대낮의 별빛을 따라 정신의 외길을 걸어온 그의 시는 낭만에 기대려 하지 않는다. 그는 서울을 벗어나 안동의 산촌으로 거주지를 옮긴 후 도심이 주는 안정감 대신 자연의 불편함을 선택했다. 새벽녘에 일어나 목수가 되어 직접 집을 짓고, 길을 만들고, 밭을 가꾸면서 농부의 마음으로 일하듯 메모를 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이미지 시를 옮겼다. 그것이 이윤학 시의 현장성이고 현존성이다.
부리와 발톱들을 쭉 뻗은 자세로
최후를 맞이한 새를 보았다. 새는 멈춤 자세로
최대의 길이를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나름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엔 나머지
체중을 비우지 못해 바닥에 의지한 자세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어 눈을 감고 말았다
최대한 부리와 발톱들을 떼어놓으려는
의지의 마침표였다 그것은 새가 자신과
끝까지 타협하지 않은 정신의 길이었다. -「시인의 말」부분.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현대의 삶이 인간의 가능성을 재단하는 반면, 예측 불가능한 자연의 삶은 인간의 존재성을 증명해준다. 적당한 감상에 기대는 것이 아닌 척박한 땅에 부엽토를 섞어 씨앗과 모종을 심는 농부의 마음으로 시를 옮기기를 위하여 그는 오래도록 달언(達言)을 삼가고 통점(痛點)에 주목해왔다. 그가 시에서 보여주는 영원성의 기약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있다. 집요하리만큼 생생한 실재적 성찰은 독자에게 그의 시가 신뢰감 있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라 할 수 있다.
한국시의 미래가 이윤학의 어깨에 달렸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일찍이 김춘식 평론가는 이윤학 시인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였다. 과속(高速)과 과언(過言)이 현대시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개성이라면 이윤학 시의 현재는 저속(低速)과 음언(喑言)이다. 현대시 세계는 언어의 산문화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고 수많은 말의 홍수로 공백이 사라져가는 현상을 보인다. 시인은 정신의 끝까지 가기 위해 많은 말을 버리고 화려한 기교와 장치들에 타협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였다. 오래 걷기 위해 자신의 무게를 비워내며 “최대한 부리와 발톱들을 떼어놓으려는/ 의지의 마침표였다” -(「시인의 말」). 더 멀리 닿기 위해 하고픈 말을 버리고 참아내는 고독한 순례자의 정신이 그의 시가 가진 진정성이다.
“아버지는 중절모를 쓴 토종벌연구가였고 개량한복을 입고 나돌았다 그는 자신만 떼놓고 이사 간 가족을 찾아 개나리 핀 지방도로를 걸었다 설탕을 한 숟가락 퍼먹으면 사라질 현기증 속에서 여왕벌이 비누거품 알을 까놓았다 설탕배달 트럭 호로에 숨어 기어이 찾아간 하우스 움막 그는 제대로 된 집을 짓기 위해 목수가 되었다 마누라와 아이들과 떨어져 달세여관을 떠돌았다 개나리꽃 울타리를 덮고 그는 자신도 모르는 데로 가 맨손으로 집을 짓는 꿈을 이어 꾸었다 중증 공황장애 당뇨 비염을 달고 작업화 깔창에 무좀양말 자국 새기며 빈 길 지워지는 중앙선 점자를 따라 걸었다” -「(개나리)」전문.
생의 아픔에 귀 기울여왔던 그의 시력은 10번째 시집까지 이어지는 동안 더욱 큰 곡선이 되어 삶을 껴안고 있다. 시는 설득이 아니라 느낄 수 있도록 보여주는 것이며 독자가 충분히 사유할 자리, 자신의 삶을 반추할 시간을 마련해줄 때 비로소 시의 행간은 풍요롭게 채워진다. 시의 여백을 시인은 묘사라고 말한다. 말을 감추고 보여줌으로써 풍경의 여백 속에 당신의 마음이 앉을 자리를 내어준다. 묘사의 전공서라 불리는 이윤학의 묘사가 독자를 매료시키는 이유는 창백하리만큼 담담한 묘사 속에 대상을 껴안는 순수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루에 엎드려 팔씨름을 하자 보채는/ 노모의 손을 쥔 남자가 손을 감싼다” -「부레옥잠, 꽃피다」부분.
“너는 순간의 내가 수없이 겹쳐진 그림자였어 이젠 싸울 힘도 없는 그림자들이 지들이 살던 개집 지붕에 올라가 희멀건 하늘을 둘러본다 개들의 와이어 줄을 따라 수레국화 꽃밭이 생겼다 여기가 하늘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진다” -「수레국화」 부분.
“허리 높이 돌담에 못 구멍 슬레이트 둘러친 그의 빈집 속이 깊은 고무대야가 한여름 뙤약볕을 받았다 펌프질 물을 받아 목간하는 그의 머리가 한여름 부기가 빠진 하늘을 치받았다” -「저녁뜸」부분.
“찢어진 대파 술잔을 기울여요 어떻게 살까를 궁리할 때는 몰랐어요 어떻게 죽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있겠다 싶은 저녁이 오고 있었다” -「대파 술잔」부분.
너무 외로워하지 않기를, 비가 내린 아침이 온다 해도
당신의 폐등대에 걸어둔 아름다운 시(詩)의 향연
이번 시집에서 괄목할 만한 부분은 여태까지 시인이 보여준 시 세계와 근사한 듯 다른 내성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연민의 감정이 애틋하고 아름다운 울림을 전달한다. 시집 제목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이 들어있는 시 「폐등대」에서 보이는 시인의 시선을 살펴보면, 이전 시집들이 실존하는 실재성과의 불가능성에 대한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는 반면, 이제는 불가능성마저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화해의 시도가 엿보인다.
“나보다 일찍 잠들면 절대 안 돼요 …(중략)… 너무 외로워하지 마세요 당신이 먼저 떠나고 당신이 그린 그림에 비가 내린 아침이 온다 해도 …(중략)… 나는 당신이 그리지 못한 그림을 마저 그릴 거예요 저녁이 되면 당신의 그림들을 폐등대를 향해 걸어둘 거예요 당신은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이에요” -「폐등대」부분.
“이 세상에서 살기 불가능한 별들을/ 그 사람을 닮은 새벽별들을/ 그 사람의 눈동자에 파종한 적이 있었다” -「별들의 시간」부분.
“상처는 찰나에 꿰매어지고/ 누군가의 눈빛으로 읽히고/ 아물 수 있다고 믿었지/ 고개를 가로젓는 달밤이 돌아왔지”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부분.
“그때는 그 무엇도 보여줄 게 없었다 솔직하게 말했어도 믿지 않았을 거란 속단, 그 사람이 원망을 끝낸 자리에서 그가 고통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소파베드와 함께 밤을」부분.
“벼꽃이 피었다 지는 시간/ 두 시간/ 수정아, 너였구나/ …(중략)… / 다랭이논 피를 뽑던 내 애비도/ 금광쟁이 네 애비도/ 눈을 비벼 봐도/ 물에 뜬 벼꽃들” -「벼꽃이 피어」부분.
“그는 꽃망울이 맺힌 진달래 분을 뜨고 있었다 산촌에서 아내에게 보여줄 것이라곤 해의 동선밖에는 없었다 그는 혼전(婚前)부터 기억의 잔뿌리가 온전치 않음을 알았다 구옥을 수리한 살림집 마당 구석에 진달래를 옮겨 심었다 …(중략)… 그는 담장 아래 묻어둔 유리병을 캐내었다 연배가 비등해진 아내가 따르는 두견주 술잔에 눈물을 감추었다 말 못하겠는 사람 눈은 비벼지고 꽃잎들 뭉크러진 자리에서 환생하는 꿈을 꾸었다” -「시한부」부분.
이전의 시집들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대상의 부재, 짝사랑을 향한 헌사였다면 이번 시집『나보다 내게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에 실린 시편의 특징은 외면했던 대상과의 마주침이라 할 수 있겠다. 이번 시집의 마지막 시편인「시한부」에서 시인은 우리의 삶이 무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상처뿐인 인생이라도, 당신 삶의 음지에 진달래꽃을 심어놓는 시인은 ‘뭉크러진 자리에서 환생하는 꿈’을 꾼다. 이처럼 시집『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은 어둡고 캄캄한 동굴 속 희뿌연 돌가루를 뒤집어쓴 광부의 가려진 낯빛처럼 쓸쓸하지만 그 속에서 캐낸 금붙이들은 뜨거운 숨을 빛으로 품고 있다. 시인의 의지와 오감을 통해 제련된 시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새싹의 전율을 느끼게 된다. 진술마저도 묘사가 되는 이윤학 시인의 아름다운 시편들을 간드레출판사의 ‘간드레 시’ 1번에서 만나볼 수 있다.


▣ 이윤학 프로필
196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여 시집『먼지의 집』(문학과지성사, 1992)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문학과지성사, 1995)『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문학동네, 1997)『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문학과지성사, 2000)『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문학과지성사, 2003)『그림자를 마신다』(문학과지성사, 2005)『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문학과지성사, 2008)『나를 울렸다』(문학과지성사, 2011)『짙은 백야』(문학과지성사, 2016)『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간드레, 2021), 장편동화『왕따』(문학과지성사, 2006)『샘 괴롭히기 프로젝트』(문학과지성사, 2009) 『나는 말더듬이예요』(주니어RHK, 2010)『나 엄마 딸 맞아?』(새움, 2012)를 펴냈으며, 김수영문학상 동국문학상 불교문예작품상 지훈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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